핀이 자꾸 튀었지만 그럭저럭 들을만 했던 것 같다. 클리브도 지나가면서, 그 곡 뭐야, 괜찮네, 하기에 내심 다른 것을 더 찾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냄새처럼 피아노 멜로디가 점점 집 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책상 앞에 붙어 사흘째 같은 일에 매달리던 그가 깜빡 잠들 정도였다.
그 날 저녁에는 원고를 무사히 넘기고 돌아온 클리브가 오랜만에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도 그럴 의도도 없어 집으로 돌아오던 클리브와 밖에서 만났다. 그 길로 근처의 괜찮은 식당으로 향했다. 계속 고쳐 오라고 성화더니 드디어 받아주지 뭐야,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너도 알지, 잭? 그래, 더 했다간 네가 책상과 의자에 붙어 버리는 게 아닌가 했어, 잘 끝났다니 다행이군. 흐흠, 잭이 그런 농담도 다 하고, 외식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글쎄, 그런 것이라고 해 두지. 그런 게 아니면 뭘까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만 조잘거리고 먹기나 해. 그으래, 난 비밀이 많은 남자도 좋아하거든, 천천히 캐내 드리지요. 저녁 식사로 주문한 스테이크를 자르며 클리브는 장난스레 웃었다. 나이프를 쥔 손이 답지않게 떨려왔으나 아무렇지 않게 나 역시 미디움 정도로 익은 고기를 문제없이 잘라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집에 다 와갈 무렵 클리브의 표정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상대도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약간 작고 어깨를 넘는 갈색 머리카락, 이 날씨에 밖에서 쭉 기다렸는지 볼이며 코가 조금은 붉었다. 스테플 씨, 전화를 안 받으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드릴 말이 있어서. 이윽고 클리브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 등을 살짝 쓸어주며, 직장 동료야, 잠깐 얘기하고 올 테니 먼저 들어가 있어, 그렇게 속삭이는 말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꽤 벌어져가는데도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전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레이스 씨.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워들으면서 잠그지 않을 현관문을 닫았다. 집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미 재생이 끝난 레코드를 빼내 다시 책장 구석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오래된 레코드를 틀었던 그 날이었다.
한 집에 살면서 이렇게 얼굴을 못 보는 게 말이 되나. 내 불만은 거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빵빵했다. 식사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컸다. 어차피 일 때문에 나는 하루의 태반을 밖에 나가 있는데, 나머지 시간 동안 그를 보려면 식사, 혹은 자는 시간이 전부였으니까.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적확했다. 잭은 그 날 이후부터 나와 함께 하는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이러다가 집을 나간다고 하면 어쩌나 싶을 만큼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무언가 화난 것이 있다거나, 요구하는 것이 있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그게 더 문제였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같이 밥도 안 먹고, 당연히 식사 뒤에 차를 같이 마시는 일도 없고, 같이 자자고 해도 원래 있던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불만이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잭, 저녁은. 먹고 왔어, 미안하지만 혼자 챙겨, 잘 자고. 요즘은 매일 이런 식이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먹고 왔다는 건지, 또 왜 저녁 7시부터 굿나잇 인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혼자 사는 줄 알겠네. 집 안에서 잭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밖에서 사온 레토르트 제품을 대충 데워 먹은 뒤 굳게 닫힌 잭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내게도 없었다.
노크 두 번,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가 싫어하는 행동이었지만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아서였으므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침대와 옷장 하나, 책상과 의자 하나씩만이 거의 사용감 없이 놓인 삭막한 방 안에 잭이 앉아 있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들어올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어서 더 울컥하는 것이 치밀었다. 잭,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이제 슬슬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 무슨 소리야, 잘못한 것이라니. 시치미 떼지 마, 나한테 뭔가 불만이 있어서 요 며칠 날 피하는 거잖아. 피한 건 맞지만 네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야, 넘겨짚기가 서투르시군, 스테플 기자님. 그게 더 이상하다고,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면 왜 피하는 건데? 너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 알 것 없어. 상관이 왜 없어, 난 너랑 같이 사는 사람인데. 클리브, 너를 위한 일이야, 그만 나가줬으면 좋겠군. 이유를 제대로 들을 때까지 안 나갑니다, 나를 위한 일이면 더욱 더 내가 알아야지.
시종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순간 덜컹했다.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그와 제대로 마주본 것 같았다. 잭의 눈 안에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여태껏 있었는데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전에도 저렇게, 울 것처럼 처연한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클리브 스테플, 운다는 게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한테 무슨 생각이야. 한참 나를 보던 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이 움직이고 혀가 움직여 말이 되어 나오는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좋아해, 클리브. 동거인이나, 뭐 그런 게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의미로.
그는 내가 대답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연습해온 사람 같았다.
아마 네가 내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거야. 알고 있어.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니, 앞으로도 원만하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 관계를 부술지도 모르는 감정을 가진 내가 단념하는 수밖에. 말하자면, 연습인 거지. 괜찮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 네가 앞으로 껄끄러워할까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군.
한 번이라도 읽어볼 걸 그랬다, 고 생각했다. 웬만해선 의도적으로 읽지 않는 게 서로 간의 예의라서 그동안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게 이렇게 후회될 줄은.
그래서 계속 이렇게 날 피할 거야, 잭?
정리될 때까지는 그렇게 되겠지.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줘.
그건 안 되겠는데.
역시 그런가.
난 네가 날 피하는 게 아주 싫거든. 매일 네 얼굴을 봐야겠고, 너랑 밥도 먹어야겠고, 잠도 같이 자야겠어.
클리브, 방금 설명했는데,
그리고 너랑 연인사이도 할 거야. 그러니까 더는 안 돼.
... 부디, 거짓말이 아니길 바라지.
이 방은 오늘 지금부터 창고로 바뀌었으니 유감스럽게도 베개 들고 제 방으로 오셔야겠네요. 그렇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작게 웃었다. 울 것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지독히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어서, 가까이 가 키스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이어도 좋았다.
"클리브, 마음에 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잭... 네가 그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그보다 전에 그 레코드, 왜 이젠 틀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