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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해버렸음을, 벨져루드

LN 2018. 5. 1. 22:19

 

벨져루드 오메가버스 기반

'사랑하지 않도록', '사랑할 수 없도록' 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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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진다. 오늘도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다. 날이 궂으니 오늘은 이만 그만둬야 할지, 이런 날일수록 더 찾으러 나서야 할지 약간의 고민 중이었다. 별 생각 없이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비가 오지만 테라스에 앉았다. 빗방울이 잘게 부서져 튀어올랐다. 일회용 컵에 담아서 다행이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그런 광경을 보는 게 이제는 질릴 법도 했지만 눈을 떼기에는 이미 습관이 들어버렸다.

별 생각이 없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에게 했던 말처럼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 때 했던 그리 많지 않은 말들 중 사실을 말한 것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심지어는 모르겠다는 말조차 진실이 아니었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말들을 지금은 상당히 후회하고 있었다. 에스프레소는 그의 표식이었다. 제멋대로 정한 약속. 좋았는지 싫었는지를 물은 적조차 없었다. 후회할 일들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이후로 매일같이 꿈에 그가 뒤돌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탓이었다. 그 등을 보고 있으면 꿈 속인데도 어쩐지 목 안이 먹먹해져 왔다. 깨어나면 눈가가 젖어 있었다. 불쾌했다. 그럼에도 붙잡아 뭐라고 한 마디 해줄 수도 없다는 것이.

뒤에서 의자가 당겨지는 소리가 덜컹 났다. 누군가 뒤에 앉은 모양이었다. 어떤 희한한 놈이 비 오는 날에 바깥 테이블에 앉는 거지. 컵을 들어 입술로 기울이는 순간 짙은 커피 냄새에 낯익은, 아주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향이 섞여들었다. 커피는 입술을 적시지도 못했다. 뒤쪽 테이블에 앉은 이의 기척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이도 그것을 눈치챘으리라 여겼으나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숨을 한 번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 모든 순간이 느리게 재생한 영상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특이한 취향이군요. 이런 날에 밖에 앉다니.

현실감을 돌려놓은 것은 그의 낮은 목소리였다. 비가 순식간에 지면으로 떨어졌다. 여태 컵을 들고 있던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사소하고 작은 행동이 왠지 부자연스러웠다. 어떤 표정을 하면 좋을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등을 기대는지 등받이가 작게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숨을 참고 싶었고, 더 들이마시고 싶었다.

저를 찾아다닌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뭐, 몇 번은 지나가다 본 적도 있고.

...

당신답지 않게 뭐 하는 겁니까.

...

다신 그러지 마세요. 그걸 말하러 왔습니다.

만나면 하려던 말이 있었다. 아주 많았다. 저 잘난 맛에 사는 그 얼굴에다 대고 해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걸 매일 곱씹으며 그의 흔적을 좇았다. 딱 한 번만 더 만나면 이 이상한 것들이 다 정리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정리는커녕, 그 무수한 말들이 다 엉켜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등 뒤의 사람이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컵이 구겨지지 않도록 쥐고 있는 일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안에 있는 커피가 아직 뜨거우니 구겼다간 꽤 곤란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한 번은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코 컵이 형체를 잃고 커피가 와락 흘렀다.

너를 좋아한다.

넘치는 순간이, 도저히 더 담고 있기 어려워지는 그런 찰나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굳이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다만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저보다 약간 더 높은 곳에 있는 시선, 잿빛 거리에서 혼자만 태양 같은 남자가 이상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하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울 것 같은 눈.

... 너답지 않은 얼굴이군.

... 당신이 당신답지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죠.

생각해보면 처음부터였다.

뭐가 말입니까.

처음부터, 너를 만난 것부터 나답지 않았다고.

그래서 후회합니까?

아니,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을 사랑해놓고서, 그 뻔한 길을 멀리 빙 돌아온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분명하게 잡아두는 건데. 사랑이 원래 이런 것이었던가. 헛웃음을 짓고는 그간의 분함을 담아 커피 향이 배인 손으로 그의 멱살을 다소 난폭하게 잡아 끌어당겼다. 이런 무례에 순순히 끌려오는 그도 남더러 답지 않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저 미울 만큼 사랑스러운 소릴 내뱉는 입술을 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니까.

머리가 어질할 만큼 향이 짙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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