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너무 많았고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을 태워도 그 두 배로 불어났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체 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을 바라볼 차례였다. 도망치려면 그럴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인정해야 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던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나약한 자신이 목 끝에 퍼런 날붙이처럼 들이밀어진 것만 같았다.
각력 강화 능력자의 클론이 제 위로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눈을 감았다. 복부를 내려찍는 일격에 통증이 온몸을 내달렸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격통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의식이 거기서 힘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뱉은 것이 피인지 숨인지 신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왜 다시 눈을 뜰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실망이 밀려들었다. 조금은 안도했고 그보다 조금 더 화가 났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 사이로 쉬이 목소리가 밀려나오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힘을 넣자 무시무시한 통증이 움직임 대신 찾아왔다. 윽, 낮은 신음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순간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오만하고 느긋한, 언제나 우리가 닮았다는 재수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의 구두 소리였다.
삼류 영화의 연출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는 곧 멎었다. 사방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히며, 죽어서도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상태만 아니었어도 당장 일어나서 저 얼굴을 걷어차줬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을 보는 표정은 그게 아닐텐데.
헛소리하지 마십쇼.
그래, 그렇지. 머리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군.
그가 습관처럼 푸른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짙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웃는 게 소름끼쳤다. 이렇게까지 흐트러져 있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저 미친놈의 하나하나에 일일이 동요하는 자신이 다른 사람 같았다. 분명히 몸이 좋지 않아 아직 상태가 불안정한 탓이었다. 더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금방 좋아질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없기를 바랐다. 사라지기를 빌었다. 누구에게, 그런 것이 중요하단 말인가, 누군지 모를 존재에게 기도했다. 그것이 어디로 가 닿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옆에 서 있었다. 환자를 쳐다보는 게 뭐가 좋다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꺼지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두 눈 위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난폭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은 다정하다고 느껴질 뻔한 손길이었다. 다정, 그것만큼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지. 한순간이나마 그 단어를 뇌리에 떠올린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무언가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끝마저 경건했다.
네가 도망갈수록 그것은 내게로 오는 길이 될 것이다. 네 모든 것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주관하시고 보살피시며 나에게 향하도록 너를 이끄실 것이다. 그리하면 내가 너를 구할 것이고, 너를 품에 안을 것이고,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는 처음과 같이 항상 영원한 아버지께서 내게 약속하신 일이니.
기도문 같은 문장들을 다 헤아리기도 전에 수마가 휩쓸었다. 꿈결같이 가물가물한 속에서도 그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기분 탓인가, 눈을 덮었던 손이 내려와 볼을 쓰다듬은 것도 같았다. 타인의 앞에서 의식을 잃는다는 기분 나쁜 경험을 되풀이한다는 불유쾌는 곧 그마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