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자락이 길게 드리웠다. 교실 안에 남은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구호 같은 것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팔을 포개어 책상에 얹고, 그 위에 천천히 머리를 대었다. 선명한 주황색 빛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들렸으니까. 이제부터 맛볼 설렘과 기대에 손끝까지 저려 왔으니까.
문을 열자마자 노을이 쏟아졌다. 창가에 가까운 구석진 자리에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항상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졸고 있다는 것이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 같았다. 뒷문을 살짝 닫는 손이 떨렸다. 이 문을 닫으면 이제 여기에는 나와 그 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에게 향하는 걸음마저 조금 떨려왔다. 그의 앞자리 의자에 걸터앉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이 천 년처럼 길었고 일분처럼 짧았다. 나는 긴장하면서 걱정했다. 맥박이 마구 뛰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봐.
그는 천천히 걸어 내 앞자리 의자에 앉았다. 그 정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빈도와는 관계가 없는 듯, 매번 긴장해버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노을이 슬그머니 교실을 둘러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정적이 가득 내렸다. 그와 나 사이에 감도는 침묵이 어색했고 긴장을 불렀고 그럼에도 편안했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었다.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리면 어쩌나 하고.
노을에 젖은 머리칼은 원래 주황이었다는 듯 반짝였다. 이렇게 잠든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노을이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까지고 그대로일 수는 없음을 알면서도 바라고 말았다. 손을 뻗었고, 그의 조금 거친 머리칼에 그 손을 폭 얹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가 깨지 않기를 빌면서 동시에 눈을 떠 나를 봐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손길이었다. 손은 멋대로 움직여 그를 소중히, 아주 소중히 쓰다듬었다.
머리에 닿은 그의 손이 다정했다. 왜 나에게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떠 그가 지금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얼굴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두려웠다.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면 내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숨을 한 번 내쉬기도 전에 들켜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손이 이대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황빛이 점점 옅어졌다. 줄지어 선 창문 너머로 이제 조금씩 푸른 빛을 띠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한심함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선배, 나 선배를 좋아해요. 그렇게 말했다가는 그나마 이어지던 선배와 후배의 관계마저 잃을 것 같았다. 잭, 하고 부르고 싶었던 마음이, 잭 선배, 라는 호칭조차 입에 올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대로 무너져 당신이 좋아 미치겠으니 제발 받아 달라고 뻔뻔스레 애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때가 오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질지도 모르는 손을 아쉽게 떼어냈다. 노을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가 일어나는 소리, 천천히 걷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내가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멀어져가는 소리. 조금 결리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직도 머리칼에 닿아 있던 손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의 체취까지도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클리브, 널 좋아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그리고 단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할 뿐인 후배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교실 안을 가득 메웠던 노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남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의 그림자가 드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