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아로하, 루이틀비, 커미션

LN 2019. 1. 27. 20:17

 

커미션 작업물

결혼하는 루이틀비

 

 

더보기

 

 

 

아로하

 

 

 

 

 

 

 

 

 

토마스는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닦고 싶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한쪽으로 향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신경 쓰여 죽겠네, 진짜.

사실 지금 이 카페 안에는 꽤 여러 명의 연합원들이 앉아 있었다. 나름대로 변장이랍시고 얼굴을 가리고는 있어도 눈썰미가 좋은 그녀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 창가 구석 자리에 레베카, 그 옆 테이블에 나이오비, 입구 쪽에 이글. 어린애들과 몸집이 큰 사람들은 금방 들킨다는 이유로 잠입 수사를 금지했다. 피터가 "그래봐야 트리비아 누나라면 다 알걸." 하는 말에는 다들 뜨끔했지만.

 

", 날씨가 좋네."

"그러게."

 

저 짤막한 대화 이후로는 서로 커피만 마시고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보는 사람 속이 다 타는 것 같다. 토마스는 닦은 컵을 찬장에 올려 놓으며 한숨을 삼켰다.

할 말이 있으니까 내일 시간 좀 내. 트리비아의 그 말이 원인이었다. 루이스도, 다른 연합원들도 그 순간 얼어붙었다. 영구동토라도 맞은 듯한 싸한 분위기에 서로 눈만 굴리다가 트리비아가 서재로 들어가고 나서야 일제히 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완전히 패닉이었다. 비단 루이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걱정이 된 탓이었다. 드디어 뭔가 큰 실수를 했냐, 혹시 때리기라도 했냐, 아니면 기념일을 잊었냐, 네일 한 거 못 알아챘냐, 싫어하는 걸 선물했냐, 지금껏 싸웠던 이유나 그보다 더 최악의 이유를 가정해 물었지만 루이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기도 짐작가는 게 없단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루이스는 아군 HQ의 체력이 손톱만큼 남았을 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따라온 것이었다. 요즘은 조용했으니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뺨이라도 맞거나, 물을 뒤집어쓰거나, 아무튼 차이면 위로도 해 줘야 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불러낸 이유가 궁금하니까. 다들 명목상으로는 루이스가 걱정된다고 부득불 약속 장소-토마스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까지 몰래 잠입했으나 실상은 대체 또 무슨 이유로 불러내기까지 한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것은 토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 선배가 약간 걱정되기도 하는 건 사실이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설마 헤어지겠어, 지금껏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데. 그러나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시종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와 상반되게 태연한 표정의 트리비아는 커피를 다 마시더니 드디어 루이스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루이스."

", ."

 

그 순간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헤어지자? 아니면 넌 최악이야?

루이스는 연인으로는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나이오비만은 속으로 몰래 생각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나 임신했어."

 

 

 

*

 

 

 

핸드폰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루이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햇빛이 비치고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연합 안인 것 같은데. 아마 어제 술 먹고 집으로 데려다 놓기가 힘들어 빈방에 놔두고 간 모양이었다.

맞아, 어제. 어제 난리도 아니었지. 새삼스레 다시 생각이 났다. 트리비아가 할 말이 있다길래 엄청 긴장하면서 갔고, 커피만 줄창 마시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들었으니.

나 임신했어.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그보다 훨씬 먼저 든 것은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루이스는 빈 커피잔을 내려놓는 그녀를 바보처럼 쳐다보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했던 게 한 달쯤 전이었고, 그 다음에는 일이다 뭐다 그녀도 자신도 바빠서 데이트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언제 같은 건 아무래도 좋지. 중요한 건 그녀가 아이를, 그것도 자신과 그녀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니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울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샌가 동료들이 옆에서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이 사람들 어디부터 들은 거야. 눈물로 흐려진 눈앞에는 트리비아가 평소보다 분명 조금 누그러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축하파티를 한다면서 펍으로 갔고, 주는 술을 정신없이 받다가 필름이 끊겼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아이에게 좋지 않다며 좋아하던 칵테일도 사양하던 모습이었다.

 

", 선배, 일어나셨어요?"

". 나 어제 뭐 이상한 짓 안 했지?"

"그럼요. 얼른 씻고 나와서 아침 드세요. 오늘 바쁘시잖아요."

"바빠? ?"

 

오늘은 아무 일정도 없었던 것 같은데. 루이스가 갸웃하자 토마스도 따라 갸웃했다.

트리비아 씨랑 결혼식장 보러 가기로 하셨다면서요?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

"미안해.."

 

내가 어제 분명 너한테 프러포즈를 받으면서 식장 보러 가자는 약속을 받아낸 것 같은데 말이지. 트리비아는 예식장 안에 들어서면서도 눈치를 주었다. 그게 따끔따끔해서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근데 어제 프러포즈를 했다고?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보았다.

 

"프러포즈, 기억 안 나?"

", ? , , 그게 아니고.."

"나 원.. 이래서 식은 올리겠어? 혼인신고 하는 것도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 몰라."

"... 이제 안 잊어버릴게.."

 

예식장 전체를 둘러보고, 꽃의 배치를 보고, 버진로드 자리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그녀는 평소의 덤덤하면서도 날이 선 말투로 어제의 프러포즈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내가 너한테 임신했다고 말했고, 네가 정신없이 우는 사이에 펍으로 다 같이 자리를 옮겼지. 한참 마시던 중에 휴톤이 프러포즈는 제대로 했냐고 묻기에 이미 취해 있던 네가 눈은 부었고 취기에 얼굴이 벌개진 채로 일어났어. 그리고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반지라도 주듯이 손을 내밀면서, "나와 결혼해주세요, 누나." 라고 했어. 물론 네가 나한테 내민 건 와인 코르크 마개였고.

 

"......"

"솔직히, 애인이 취한 상태에서 붕어눈을 하고 코르크를 주면서 프러포즈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재밌었어."

 

죽고 싶다. 어제의 나는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닌 거야. 루이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와중에도 트리비아는 샘플 책자를 받아 꽃이며 장식물들의 종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식장 같은 건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으로 하면 되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프러포즈였다. 그런 엉망인 프러포즈를 한 것도 그렇고, 그걸 모두의 앞에서 한 것도 그렇고, 지금 당장 죽고 싶다. 루이스는 반쯤 넋이 나가 이 예식장은 별로라며 자신을 끌고 나가는 그녀의 말에도 전혀 대답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첫 번째보다 좀더 넓었다. 여기에 연합원들이 다 온다고 해도 꽉 차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며 매니저에게 옵션을 따지는 트리비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다들 뭐래? 그렇게 물었더니 트리비아가 웃었었다.

휴톤과 데미언과 러쉬톤은 웃어댔고, 네 후배는 당황해서 널 쳐다봤지. 잉게와 레이튼은 골 때린다는 표정이었어. 나이오비 걔, 연애적인 면에서의 너는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고 그러더라고. 이글이 막 웃으면서 코르크 마개를 반지 모양으로 잘라줄까 하길래 사양했어. 너 혼자만 진지하게 그러고 있길래 일단은 받았지. 그리고 "그럼 내일 당장 식 준비하러 가자." 라고 하니까 네가 알겠다고 했어.

그랬는데 그게 모조리 기억이 안 난다고? 그녀는 약간 무시무시한, 전장에서 콤팩트를 닫을 때의 웃음을 지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안 그래도 주량이 얼마 안 되는데 주는 대로 받아 마실 게 뭐람. 그 상황에서 프러포즈 이야기를 꺼낸 휴톤도, 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어준 도일도, 아마 앞으로 5년은 이걸로 놀릴 이글도 다 싫었다. 당연히 프러포즈조차 진작에 안 했던 자신이 제일 싫었지만. 루이스는 두 번째 식장에서도 트리비아의 손에 이끌려 나오며 속으로 머리를 몇 번이고 벽에 박았다.

 

", 그래도 누나라고 한 건 마음에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세 번째는 예식장이 아닌 작은 성당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색색의 빛이 내려오고, 초 냄새와 종이 냄새가 엷게 나는 곳이었다. 그녀는 루이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요즘은 그래도 둘이 있을 때는 높은 힐을 신지 않았는데, 오늘은 12센티 킬힐을 신고 온 탓에 이마에 키스도 가뿐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힐의 높이는 그녀의 기분을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였으므로, 루이스는 이로 인해 어제의 프러포즈 등등이 트리비아의 마음에 영 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기억했다면 오늘 아침 일찍이라도 반지를 사와 지금 여기서 당장 프러포즈를 다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웬일로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빌리기로 했다며 나무의자의 등받이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역시 신경 쓰이는 것 때문에. 수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트리비아를 멀리서 앉아 쳐다보며 루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좀더 멋진 곳에서 분위기를 잔뜩 잡고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아까부터 왜 정신이 나가 있어?"

"그냥.. 여기 마음에 들어?"

", 괜찮네. 자기도 괜찮지?"

"난 트리비아가 좋으면 좋아."

"그럼 됐어. 가자."

"."

 

그리고 누나라고 불러. 안 그러면 프러포즈 건까지 합해서 화낼 테니까.

트리비아는 나름대로 그 일에 대해 자기 안에서 화를 삭인 모양이었다. 크게 경을 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그러나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루이스는 성당의 문을 조용히 닫으며 생각했다.

 

 

 

*

 

 

 

커튼이 걷히고, 앞에 앉아 있는 루이스가 보였다. 트리비아는 부케를 고쳐 잡으며 곧 결혼해 남편이 될 남자를 쳐다보았다. 비록 그 남자가 프러포즈도 변변치 않게 했고, 청혼하며 반지를 주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그런 점까지 포함해 귀여우니 봐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럴 때는 열심히 기분을 맞춰 준다든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딴생각에 잠긴 게 빤히 보이는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 ?"

"이건 어때?"

"예쁘네. 좋아."

 

예쁘네, 좋아, 그걸로 하지 그래, 괜찮네, 그것도 좋아. 드레스를 맞추러 와 이곳에서 입어본 드레스 수만큼 루이스가 반복해 대답했던 말들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보다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제일 많이 싸우고 파혼한다던데. 자칫하면 우리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트리비아는 드레스의 감촉을 손끝으로 만져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루이스의 턱시도는 자신이 골라 줄 것이고, 자신의 드레스도 자신이 고를 것이지만, 이왕이면 그 날 제 옆에 서 있을 루이스의 마음에도 드는 걸 고르는 게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데이트든 뭐든, 침대 위에서조차 자신이 모든 면에서 루이스를 리드해 왔지만 결혼식 정도는 루이스가 리드하는 걸 좀 보고 싶기는 했다.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너 지금 다른 생각 하고 있지?"

", 아냐. 듣고 있었어."

"그래? 그럼 지금까지 입은 것 중에 뭐가 좋아?"

"...."

 

하나도 제대로 안 봤을 테니 무리겠지.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건 좋지만 이미 기회는 날아갔으니 결혼식에 집중하면 더 좋을 텐데. 두 번째 프러포즈 같은 걸 받아봐야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루이스는 쩔쩔매며 눈을 굴리더니 지금 입고 있는 종류가 어울리는 것 같다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옆에서 직원이 신랑 분도 좋다고 하시니 이런 라인으로 골라드릴까요, 하며 웃었다. 우선은 이 정도로 봐 줄까. 이번에야말로 한숨을 작게 내쉬며 트리비아는 커튼을 다시 쳤다.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야 연하답게 귀여운 맛도 있고, 적당히 다루기도 쉽고, 키가 조금 아쉽지만 외모는 그런대로 괜찮고. 나이오비의 말은 조금 틀린 구석이 있었다. 연인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결혼하기 좋은 상대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아예 같은 선에 놓아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왜 그런 분위기도 로맨스도 없는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하기를 결정했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가 생겨서, 단지 그것만으로는 결혼을 했을 때 포기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허리 아래로 주름이 풍성하게 잡힌 드레스 한 벌을 골라들며 메이크업을 어떻게 할지 잠깐 딴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니 반지도 못 받았는데, 그것도 같이 맞추러 갈까. 네일도 생각해 둬야 하고. 루이스의 턱시도는 어떤 게 어울리려나. 부케를 드는 것도 잊고 커튼을 열자, 거기에 루이스는 없었다.

 

"... 루이스는?"

"갑자기 볼일이 생기셨다고.."

"...."

 

난 왜 이런 남자랑 결혼하려는 걸까.

정말로 파혼되는 건 아닌지,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를까봐 트리비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아랫배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전신거울을 돌아봤다. 여기에 붉은 장미 부케를 들면 좋을 것 같다. 이걸로 하자고, 약 스무 벌쯤 갈아입느라 같이 고생한 직원에게 일러두었다.

 

"부케는,"

", 부케라면 신랑 분께서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따로 준비한다고 하시더라구요."

"루이스가요?"

", 부케는 어울리는 게 없어 보인다고."

 

뭔가 준비하는 게 맞기는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린 건 좀 괘씸하다. 오늘 저녁은 없을 줄 알아.

네 아빠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작게 중얼거리며 트리비아는 샘플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벗었다.

 

 

 

*

 

 

 

이글은 긴장했다. 괜히 물을 세 번째 마시고 있지만 전혀 진정되질 않았다. 아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루이스가 신경쓰여 죽을 것 같았다.

저 꾸질하게 다니는 녀석이 오랜만에 광나는 걸 보니 트리비아가 골랐을 턱시도가 확실히 날개이긴 한데, 그것도 저렇게 분주히 다니니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그러게 왜 그랬냐고 탈탈 털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트리비아가 완전히 눈치 챌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트리비아는 다른 방에서 메이크업 고치고 있으니 아마 아직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쬐끄만 연합 안에서 루이스가 청첩장을 돌리고 다녔다. 원래는 우편으로 부치려다가 말았다고, 하얀 청첩장을 건네며 루이스는 웃었다. 그리고는 받아드는 손을 꽉 쥐고 "꼭 여기 적힌 대로 해줘. 잊으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길래, 하면서 열어보았더니 몹시 의외인 것이 적혀 있었다. 준비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다행히 잊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청첩장의 주인인 그 루이스였다.

 

", 넌 가져왔냐?"

"그럼요. 이글 씨는 안 잊으셨어요?"

"당연하지. 다른 애들은?"

"다들 가져왔대요."

"그나저나 루이스는?"

"... 선배는... 아직이래요..."

"그 자식, 진짜.."

 

옆에 와 앉은 토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날까지 사고를 내다니. 요즘 좀 정신 놓고 다니는 것 같기는 하던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진작에 상담이든 뭐든 좀 들어줄 걸 하고 이글은 후회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결혼식을 트리비아의 모국인 스웨덴 식으로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청첩장에 답장도 받아야 하지만 그 대신 스웨덴에서 하듯 드레스코드를 작게 적어 둔 것이었다. 드레스코드는 딱 하나뿐이었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가져올 것.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이벤트인가 해서 다들 별말 없이 챙겨왔다고 했다. 영국식으로 신부는 빌린 것, 물려받은 것, 새것, 푸른 것으로 치장하고 6펜스를 구두에 넣어야 하지만 그것도 생략했다고 들었다. 대신 푸른 것은 트리비아가 하고 싶다고 해 그러라고 했단다. 얼핏 지나가던, 신부 들러리를 맡은 엘리가 푸른 옷을 입은 걸 보니 틀림없었다. 신랑 들러리인 피터는 루이스와 같은 디자인의 턱시도를 입고서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잔뜩 부풀린 것을 토마스가 겨우겨우 달래 놓았다.

그래서 지금 뭐가 문제냐면, 예물이자 두 번째 프러포즈에 쓸 청혼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루이스가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메이크업이고 치장이고 내팽개친 채 그 반지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트리비아가 저 꼴을 못 보고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다행인 일이라고, 토마스와 이글은 몰래 안도했다. 기껏 멋지게 만회하려고 준비한 이벤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다니.

어쨌든 찾는 데 별로 진전이 없어 보이니 도와주러 가야겠다며 이글이 일어섰다. 토마스도 피터가 얌전히 있을지 걱정된다며 따라 나섰다. 조용한 성전 안을 나서자 문 바로 앞에 루이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못 찾겠어.. 아무데도 없어.."

"그럼 어떡해요, 지금 사러 갈 수도 없잖아요!"

"어디 놔뒀는지 기억이 안 나.."

 

이게 그 영웅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평소에도 그다지 멋있지는 않았지만, 이건 좀. 트리비아가 알기 전에 돌려놔야 한다고 루이스를 일으키면서 이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고 있던 나이오비를 붙잡고 묻자, 그녀는 트리비아가 아직 대기실에 있다고 했다.

 

"루이스, 무슨 일 있는 것 같던데."

", 아니, 일은 무슨!"

"맞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 아무래도 좋지만, 사고 치지 마."

 

그리고 넥타이 비뚤어졌어. 살짝 올라간 넥타이를 고쳐 주고 그녀는 신부 대기실로 가 버렸다. 사고 치지 말라는 건 분명 이글 자신이나, 그 외 분위기에 휩쓸려 행동하는 다른 사람들을 말한 것이었겠지만 이번에는 헛다리였다.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어디어디 뒤져봤어? 루이스의 양팔을 하나씩 끼고 이글과 토마스는 다른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랑 대기실, 화장실, 복도, 계단, 성전 앞, 성당 주변, 샅샅이 훑어봐도 반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구누구씨가 와서 스캔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식까지는 이제 30분도 남지 않았다. 주례를 재단의 브루스-엘리가 곰 할아버지라며 좋아했다-에게 부탁했으니 어트랙티브도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에 걸기에는 너무 촉박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울한 얼굴로 축 처져 있는 세 사람의 옆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신부 입장."

 

차분한 목소리가 식의 메인을 알렸다. 열린 문으로 하얀, 인어와 닮은 라인의 드레스를 입고 푸른 물빛 코사지를 단 트리비아가 들어섰다. 약간 경쾌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는 부케도 들지 않고, 런웨이를 걷는 듯한 모습이었다. 입장하기 직전까지 부케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거의 식이 엎어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막았다며, 엄청 무서웠다고 레베카가 뒷풀이 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표정은 거의 전장에 나갈 때와 비슷했다. 막 옆을 지나쳐 적진에 향하는 양 나아가는 그녀의 앞으로 장미 한 송이가 툭 튀어나왔다.

 

"뭐지?"

"트리비아 씨 거예요."

"드레스코드 못 봤어?"

"루이스가 이벤트 준비했나보지~"

"오늘 예쁘네, 트리비아!"

"루이스도 제법이데이."

"누님, 드디어 골인이네."

"애 이름은 정했어?"

"결혼 축하해, 누나."

"루이스 옵빠가 울리면 엘리한테 말해, 온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군."

"축하드려요, 트리비아 씨."

 

토마스, 나이오비, 레베카, 휴톤, 도일, 이글, 레이튼. 앞으로 가면서 그녀의 손에 장미가 하나씩 늘어갔다. 이미 단 앞에 도착해 있던 루이스의 뒤에 선 피터에게서도 한 송이, 루이스의 옆에 도착한 뒤 들러리로 따라온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엘리에게서도 한 송이, 주례인 브루스에게서도 한 송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회를 보던 마틴에게서도 한 송이.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트리비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번 프러포즈 때처럼 한 손을 내민 채였다. 이번에 그 손에 들린 것은 코르크 마개가 아닌, 장미 한 송이와 그 줄기에 걸어 놓은 반지였다.

저거 찾느라 개고생 했지. 잘도 태연하게 내민다고 토마스와 수군거리며 이글은 물을 또 마셨다. 마침 그 때 온 사람이 마틴이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영영 반지는 못 찾고 루이스는 파혼당하고 트리비아가 연합에서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작전의 정보 한 가지와 맞바꾼 반지는 그야말로 연합 전체의 평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반지가 엘리에게서 나왔을 때는 엄청 놀랐지만. "누가 놔두고 간 것 같아서 엘리가 찾아주려고 그랬어!" 루이스보다 낫다. 둘은 그렇게 생각했다.

 

"루이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프러포즈 엄청 실망했었잖아."

"그래서?"

"만회하려고 준비했어.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나와 결혼해주세요, 누나."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뺨을 붉히며 그 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루이스를, 트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보는 사람이 다 긴장될 만큼 한참 그러고 있던 그녀는 루이스에게서 장미를 받아들었다. 이건 네가 끼워 줘, 하며 반지는 도로 내밀었지만, 그만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로써 두 사람은 이 시간을 기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유치한 맹세 같은 건 안 물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브루스는 크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 반지의 쌍은 언제 준비한 거람. 트리비아 역시 루이스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작은 한 다발이 된 장미를 루이스의 넥타이를 풀어 그것으로 묶고, 그녀는 루이스의 턱을 잡아당겨 짙게 입맞췄다.

웨딩 케이크를 자른 다음부터는 거의 펍에서 회식하던 것과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주당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떠들썩하게 잡담을 나누고, 각자 좋을 대로 먹고 마시는 것은 연합의 평소 모습이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브루스와 마틴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반지, 어디서 찾았어?"

".. 알고 있었어?"

"엘리가 끼고 있는 걸 봤지."

"미안..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너 하나 정도 데리고 못 날지는 않으니까."

 

그 서툰 점까지도 가지고 가 줄게.

트리비아는 살짝 웃었다.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나 역시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술 대신 홍차를 한 모금 삼키는 그녀의 왼손을, 루이스는 가만히 쥐었다.

햇살이 투명한 3월의 낮이었다.

 

 

 

 

 

 

FIN.

 

 

 

 

 

'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벨져루드  (0) 2019.03.31
로맨스코미디, 다무루이  (0) 2019.03.15
연탄곡, 클잭  (0) 2018.07.25
밤의 이름, 클잭  (0) 2018.07.24
메시아, 제키루드  (0) 2018.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