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誤錯, 바스마르, 커미션

LN 2022. 12. 19. 18:28

 

바스마르 커미션 작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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誤想

For. stonepig_

 

 

 

기차를 타고 올 때 저 멀리 호수인지 강인지 모를 것을 보았다. 스산한 겨울 풍경에 시린 하늘색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보니 네 생각이 났다. 너와 함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깃발처럼 흔들리는 네 머리칼과 파란 물결이 담기는 네 눈을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런 시간이 없었지, 하고 별 것 아닌 얘기들을 물속에 툭 던지고 이내 날이 많이 춥다며 손을 잡고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불쾌한 감각이었다.

 

 

*

 

 

저쪽이 그 식당 같은데, 갈까?”

그래, 미리 몇 번 드나들어 둬야지.”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짐을 가져다 놓고 나온 지 한 시간쯤 지나자 마을을 대강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작은 동네이니 쥐새끼가 숨어들기도 좋겠지. 바스티안은 유일히 거친 언사를 자제하고자 마음먹은 이의 앞에서 그다음 문장을 생략했다. 그는 거칠게 말할 수도, 유순하게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마르티나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가식을 떨며 바스티안이 마르티나의 허리에 팔을 감고 걸었다.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시선에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지극히 신사적인 매너로 가게의 묵직한 나무문을 열어 잡아주면서 들어가시죠, 부인, 하는 능청에는 마르티나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로 오래된 사이였다. 그렇기에 이번 작전을 둘이 맡겠다고 하는 바스티안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뭘 자꾸 그렇게 찾아?”

모임의 멤버들이 있나 해서. 근데 이렇게 본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알면 그냥 먹어. 여기 생각보다 먹을 만하네. 요즘 맘 편히 밥도 못 먹었잖아.”

넌 걱정이 너무 많아.”

내가? 파벨이 들으면 기절하겠군.”

 

빠릿한 척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본질을 볼 줄 모르는 연합원의 구역질 나는 이름을 입에 담으며 바스티안은 웃었다. 하나같이 시시했다. 숭고한 사명 아래 모였다고 하지만 다 덜떨어지는 놈들이었다.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집단이었다. 그러니 저 같은 놈에게 연합의 휘장을 쥐어주는 것 아닌가. 속으로 넌더리가 날 정도로 제가 몸담은 조직을 폄하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굴과 말투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바스티안이 마르티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오직 상냥한 웃음과 조각낸 고기를 직접 입 앞에까지 대령해 주는 장난스러운 친절, 그리고 과중한 업무에 지쳤을 그를 염려하는 호의뿐이었다.

 

파벨도 알 거야. 네가 내 일에 대해서는 아주 지나칠 만큼 신경 쓴다는 거.”

그럼 얼른 받으시죠, 부인을 걱정하는 남편 팔 떨어지기 전에.”

그 소리 그만하면 안 돼?”

 

가볍게 질색하듯 말하면서도 마르티나는 바스티안이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모두에게 공정한 마르티나도 바스티안의 다소 지나친 관심과 호의에 원하든 원치 않든 물들어버린 게 분명했다. 바스티안은 그게 못내 만족스러웠다. 아주 기꺼웠다.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알았을 때 마르티나가 지어줄 표정이 기대됐다. 눈앞의 마르티나를 상상 속의 마르티나와 데칼코마니로 만들기 위해 바스티안은 있는 힘을 다해 헌신적으로 그를 보필했다. 예를 들면 가짜 남편 행세라든지.

마르티나는 잘 때 꽤 많이 뒤척인다. 피로할 때는 죽은 듯이 굳어 있지만. 새벽 네 시에도 눈을 뜨자마자 쌩쌩하게 아침 훈련을 가면서 가끔은 오전이 다 가도록 이불에 파묻혀 있을 때도 있다. 자는 걸 억지로 깨우면 잠깐 찡그리며 투정을 하려다가도 곧바로 무슨 일이냐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어온다. 깊게 잠드는데 이상하게 주변 상황이 바뀌는 것을 잘 알아챈다. 이제는 상당히 흐려진 그의 어린 습관의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날이 서 있던 감각들도 따뜻한 물에 잠긴 듯 누그러지고는 했다.

바스티안은 휘감고 들어온 새벽 공기가 충분히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직 잠든 마르티나 옆으로 다가가 침대 아래에 조심히 앉았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감히 옆에 누울 수조차 없었다. 내가 널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알까. 해도 뜨지 않은 이 새벽부터 무슨 일로 나갔다 왔는지 그가 안다면 이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여주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이 순간이 좋았다. 푸른 어스름에 젖은 마르티나의 옆얼굴은 유화로 새겨넣고 싶을 만큼 경건했다. 불타기 전의 종교화를 보는 기분으로 바스티안은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여명을 맞았다.

 

 

*

 

 

며칠이 지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휴가에 가까운 날들이 이어졌다. 목표한 모임의 꼬리를 잡으려면 우선 잠입해야 했고, 그러려면 눈도장을 지겨울 정도로 찍을 필요가 있었다. 바스티안과 마르티나는 사이좋고 다정한 비능력자 부부를 연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진저리치던 마르티나의 반응을 즐기는 게 주된 일이었지만 어색하게나마 여보 당신 하며 팔짱을 끼는 그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너무 즐거웠던 탓이다. 마치 정말로 신혼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에 젖는 바람에, 찬 기운이 올라와 옷을 껴입고 있어야 하는 스산한 여관에서 내내 창밖을 살피는 것마저도 어떤 로맨틱한 행위처럼 느껴진 게 분명했다.

 

마르티나, 안 추워? 거기 바람 들잖아.”

어제까지 이 시간대에 자주 보이던 사람이 오늘 한 번도 안 나왔어. 요즘 모임 내부 분위기가 흉흉하다던데, 그 탓일지도 몰라.”

착각하지 마. 저건 다 능력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놈들일 뿐이야. 내부 분열이라면 우린 파티라도 열어서 환영해야지.”

 

안 그래, 수장님? 덧붙여 묻는 목소리와 함께 마르티나의 어깨에 그 머리칼처럼 짙은 숄이 얹혔다. 고집을 꺾는 대신 히터를 질질 끌고 다가온 바스티안이 어제 함께 외출했다가 부인에게 잘 어울리겠다느니 하는 상술에 맞춰주는 바람에 사 온 것이었다. 창문과 가까운 침대에 풀썩 앉은 바스티안은 나무로 된 창틀을 더듬는 마르티나의 발갛게 언 손끝을 시선으로 훑었다.

마르티나는 제 몸을 깎아가며 모든 사람을 구하려는 정신나간 구세주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오만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가 걱정하는 것은 사라진 주시 대상이 아니라 임무 그 자체라는 것을 바스티안은 알았다. 그러니 옆에서 이렇게 얼쩡거려도 눈길 한번 안 주지. 과연 바스티안이 한참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가장 높은 곳에서 홀로 빛나는 별다웠다. 그런 게 어울렸다. 아무리 팔티잔의 모든 이들이 굳건히 지지한다 해도 결국은 혼자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할 자리, 그리고 걸맞은 품위, 지성,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이 마르티나의 또렷한 턱선으로 향했다. 기민하게 눈치챈 마르티나가 바스티안을 불렀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두 사람이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아니냐고 생각 없이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의 헛소리였다. 바스티안은 어디까지나 그가 허락한 곳까지만 파고들 뿐이다. 친절한 척, 상냥한 척, 그의 의사라면 기꺼이 동조하고 헌신하는 척, 그렇게 해서 얻어낸 자리가 이곳이었다. 그러니 섣불리 그 모든 것을 팽개칠 리 없었다. 이것은 연기다. 환영이다. 마르티나는 꿈에도 모를 제 능력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이제 밀어내든 물러나든 이 시답잖은 장난질에 어울리지 않겠다는 신호가 나와야 하는데.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상상 속의 마르티나를 보고 있던 바스티안이 눈앞의 마르티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마르티나가 그 눈으로 끌어냈다. 당황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고요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불편해졌다.

 

바스티안, 여긴 우리 둘밖에 없어. 너도 좀 쉬어.”

 

아나벨라 뺨치는 연기력 자랑은 내일 밖에 나가면 마저 하고. 그가 덧붙이며 웃었다. 세기의 대배우 아나벨라 장 마리에가 주연으로 나오는 유명한 영화 정도는 언젠가 둘이서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약간 어리고 조금 더 서툴렀던 그때의 마르티나를 떠올리려 애쓰며 바스티안은 그의 거절을 웃어넘겼다. 그래야지,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

 

 

새벽 내내 내장이 다 뒤집히는 듯 불쾌한 기분이 이어졌다. 연합에서 온 연락을 받은 바스티안은 있는 힘껏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게 다 순조로웠다. 지금 연합에서는 독일군의 눈속임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져 쥐도 새도 모르게 몇 명이 사라졌고, 성실한 마르티나는 능력자 혐오 단체가 더 큰 세력과 손을 잡고 무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추적하느라 외딴 마을에 발이 묶여 잠들어 있다. 기대 이상으로 큰 성과가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과연 연합의 휘장을 먼지 쌓인 동네에 숨겨둔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도 바스티안은 불쾌했다. 손끝에서 시커먼 환영이 뚝뚝 떨어져 사라지길 반복했다. 바닥에서 부글부글 끓는 환영이 마르티나의 얼굴로 변했다가 이내 스며들듯 어둠이 되었다.

저 멀리 달빛이 비치는 물웅덩이 같은 게 보였다. 이곳으로 올 때 보았던 호수였다. 일을 마무리한 뒤 마르티나에게 들렀다 가자고 제안하면 분명 응해줄 것이다. 연합이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보고를 가로채 바꿔 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웠다. 이제껏 바스티안이 마르티나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촌구석에 있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인지 뭔지 외에는 그의 모든 것이 이제는 바스티안의 손 안이었다. 그걸 떠올리면 아무리 연합 놈들이 멍청하게 굴어도 한 번은 더 상냥하게 참아줄 정도로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진흙을 삼킨 것처럼 짜증이 치밀었다.

연합을 헤집어놓기에는 아직 이르니, 역시 이 마을이든 그 무고한 단체가 되었든 뒤집어엎은 다음 떠나야겠다. 뒷일이 어떻게 되어도 바스티안은 마르티나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를 속여넘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둘이서 겨울 호수 구경도 좀 하고, 여유 있게 돌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연합원 실종 소식을 수장님께 바쳐야지. 그래야만 이 불쾌감이 좀 누그러질 것 같았다. 실마리조차 잡지 못해 고뇌하는 마르티나의 근심에 찬 얼굴까지 보면 아주 나긋하게 입안의 혀처럼 굴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수장님이 병이라도 들면 곤란하니 그 숄도 잘 챙기고. 마르티나의 머리칼과 꼭 닮은 색이라 마음에 든 물건이었다. 그걸 산 게 여기 와서 가장 잘한 일 같았다. 바스티안은 이제 다시 그가 새벽마다 닳도록 바라본 유화를 영접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직은 그림을 태울 때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적기가 있는 법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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